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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운영위원
제 목    7세 석간공 운흘(石磵公 云仡)

공은 1332년(고려 충숙왕원년) 건(虔)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회양공 신(淮陽公 愼)과는 재종(6촌)간이다.호를 석간(石磵)이라고 하였으며 스스로는 석간서하옹(石磵捿霞翁) 또는 몽촌(夢村)이라고 하였다.
1357년(공민왕6년)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 서기가 되고 각문사인(閣門舍人)을 거처 1361년(공민왕10년)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라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여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이듬해 국자직강(國子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서해,양광 삼도 안렴사를 지내고 1374년(공민왕23년)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상주 노음산 기슭에 은거 출입할때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 <기우도:騎牛圖> <찬석간가:贊石磵歌>등 작품을 지었다.1377년(우왕3년)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기용.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1380년 광주 고원강촌에 은퇴,사평원(沙平院),판교원(板橋院)을 중건하여 원주(院主)가 되었다.1388년(우왕14년) 창왕 즉위후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했으며 첨서밀직사사,동지밀직사사를 거처 1390년(공양왕2년) 계림부윤을 지냈다.1392년 조선 개국후 강능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저서로 석간집(石磵集),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있다.1404년(태종4년)에 돌아 가셨고 무후하며 묘는 현 서울의 동쪽 아차산에 있으나 실전되었다.


공이 1404년(태종4년) 별세하기 즉전에 묘지(墓誌)를 자작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조운흘은 본관이 풍양인인데 고려 태조의 신하 평장사 조맹의 삼십대손(13대손의 도서임)이다.공민왕때에 흥안군 이인복의 문하에서 등과하여 두루 내외직을 거처 패인오주하고 관풍사도하였는데 비록 큰 명성이나 공적은 없었지만 또한 더러운 수루도 없었다.나이 73세에 광주의 고원성에서 마치니 후손은 없다.해와 달로 구슬을 삼고 청풍과 명월로 제수를 삼아 양주 아차산의 남쪽 찰가야의 공자 행단상.석가 쌍수하에 장사 하였으니 고금의 성현이 어찌 독존할 자가 있으리요.어허! 인생사가 끝났도다>

※여기서 시조부터 30대라고 한것은 13대의 오기로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석간공은 고려말분이라 고려초의 시중공과는 400여년밖에 되지 않는데 30대손이란 말이 되지 않는다.여기서 우리가 얻은것이 시중공부터 6대 실전이라고 일컬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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