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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운영위원
제 목    조경(趙璥)의 자명(自銘)

나 역시 세속적인 것을 면치 못했다



조경(趙璥)의 자명(自銘)



거사가 아내의 묘갈에 글을 새기고 나서 또 스스로 명(銘)을 지어 왼쪽에 다음과 같이 새겨 넣었다.


“거사는 풍양(豐壤)사람이다. 시조 휘 맹(孟)은 고려에서 시중 벼슬로 있었고 본조에 들어와 여러 왕때에 홍문관 학사를 지냈다. 고조 휘 흡(潝)은 인조를 보좌하여 사직을 안정시켜 관직은 좌윤에 이르렀고 시호는 경목(景穆)이었다. 부친 휘 상기(尙紀)는 관직이 원주 목사에까지 이르렀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비(妣) 정부인 장흥 임씨(長興 任氏)는 고려 태사 의(懿)의 후예이시다.


거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지혜로워 문자를 볼 적에 마치 본디 알고있는 것 같았다. 선군께서는 그 기질이 청명하여 장수하기 어려우리라 걱정해서 학문을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사는 다른 사람이 글 읽는 것을 들으면 곁에서 외워 잊지 않았으며 다섯 살에는 스스로 글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유년기에 이르러서는 시가 더욱 맑고 우아했다. 언젠가



조각배 광나루에 매어있는데


성근 비 가을 강에 떨어지누나


나룻가 텅 비어 사람 보이지않는데


흰 새만 내려앉길 쌍쌍으로 하네.



扁舟擊廣津 疎雨落秋江


汀空不見人 白鳥下雙雙



라는 시를 지으니 백부 상서공이 그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의 천리구(千里駒)다”라고 했다.


차츰 성장하여 대략 공령(功令, 科文)을 익히고 중관(中窾, 적중하여 정곡을 찌름, 合當, 適合의 의미)에 능통하자 속마음으로 몹시 쉽게 여겨 힘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에는 이치를 궁구하고 원리를 파악하는 학문에 뜻을 두어 성(性)과 명(命)의 인식, 은미한 도심을 정일(精一)하게 추구하는 일로부터 도교, 불교, 의술, 점복, 음양, 술수, 기오(奇奧)에 이르기까지의 서적들을 전부 연구하고자 했다. 시에 대해서는 더욱 혹애하였다. 마침내 크기만 하고 텅 비어 요지를 얻지 못했고 갖가지 질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하여 심령이 이 때문에 급격히 감소하고 의지는 날로 변질되었다.


이윽고 선군께서 별세하시자 거사는 몹시 애통하여 살지 못할 것 같았으나 선비(先妣)의 보살핌에 힘입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6년이 지나자 마음이 차츰 안정되어 비로소 공거(公車, 과거)의 글을 전공하여 3년이 지나 을과에 뽑혀 관직이 이에 현달하게 되었다.


거사가 비록 영달의 길에 나아갔으나 평소의 의지와 사업 중에 한 가지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이 즐겁지 않고 너무나 슬퍼서 매번 제명(除命)이 이르러오면 번번이 굳이 사양하고 취직하지 않았고 취직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스스로 면직하고 떠났다. 그러나 조정은 그의 재주 없음을 모르고 함부로 추천하여 숭반(崇班)에까지 이르게 하니 그 동안 받은 고신(苦身,직첩)이 백(百)의 단위로 헤아릴 정도였다. 내직으로는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양관 대제학, 대사헌, 대사마, 대사구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유수, 관찰사를 지낸것이 역임했던 직책증에 큰 것들이다. 옛적에 일컬은 “행도(行道)의 직임”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벼슬로 나아감과 벼슬에서 물러남, 현달함과 곤궁함이 조처로 나타난 것은 모두 억지로 세상 인연에 맞춘 것이지 기실 그가 원한 바는 아니었다.


일찍이 개연히 탄식하며 “세상 사람들은 오직 한 해의 회계를 장부에 기입해서 기일 안으로 조정에 보고하는 일만을 일삼아 여기에 힘쓰고 힘써 지칠 정도이니 어떻게 도가 절로 행해지겠는가? 나 역시 세속적인 것을 면치 못하고 그저 그런 대로 다시 그러함 뿐이다” 라고 말했다. 이를 듣는 자가 불쌍하게 여겼다.


병이 심해진 뒤로는 집안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학문에 있어서는 아직 도를 듣지 못했고, 효에 있어서는 자식 된 직분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그 잘못이 크거늘 하물며 임금을 잘 섬김에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내가 죽거든 사(士)의 복(服)으로 염습하고 한 달이 지난 뒤 하관할 것이며, 현훈(玄纁) 따위의 패물을 증여하지 말고 정삽(旌箑)을 설치하지 말 것이며 이금(侇禽)과 곽(槨)도 제거하고 제사에 있어서는 밥, 국, 떡, 면, 생선, 고기, 채소, 과일, 각각 한 접(楪)이면 충분하다. 예는 화려하기보다는 차라리 간소하게 해야 하거늘 하물며 내가 나의 잘못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고자 하는데 화려한 것이 옳겠는가?”


또 입으로 다음과 같은 <사운시(四韻詩)>를 읊었다.



내 삶은 보기에는 이러하나


옛일은 그대로임을 재확인하나니


백옥에 대해선 마음속에 계율을 지니고


청산은 꿈에서 연(緣)을 만든 그대로다.


정정하여 마치 비춰줌이 있는 듯 하지만


막막하여 점점 현묘(玄妙)한 곳으로 돌아가니


그 누가 말했던가. 구름은 자취가 없이


다만 응당 저 하늘에 있을 뿐이라고.



我生觀卽是 舊事認依然


白玉心持戒 靑山夢作緣


亭亭如有照 漠漠漸歸玄


誰謂雲無跡 祗應在彼天



거사가 젊었을 적에 꿈속에서 백옥의 규수를 잡고 입산하여 참선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풍악을 노닐게 되어 꿈속에서 본 바가 아득하게 마치 전생의 일과 같음을 처음으로 깨달았으니 시에서 드러났던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이는 거사의 자명(自銘)이다.


명(銘)이 완성되자 병이 갑자기 차도가 있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혜를 입고 경조윤(한성부윤), 대종백(예조판서)이 되었으나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 탁지(호조)의 장으로 특지(特旨)를 입고 발탁되어 판금오(判金吾) 겸 규장각 제학에 제수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관서백(關西伯, 평양감사)이 되었고 우의정에 진배(進拜) 되었다.


은혜는 더욱 중후했으나 보은은 더욱 하잘것 없었으니 이는 그 죄가 옛날 스스로 명(銘)을 지었던 때와 비교해볼 때 또한 더욱 갑절이 되었다. 아아 석씨(불가)에게 삼생에 관한 설이 있는데 과연 그렇다면 내가 속죄할 방법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거사의 옛 이름은 준(埈)인데 준(埈)을 경(璥)으로 바꾸었으니 이는 회갑부터 시작했다.



이 비명은 남인의 정치가 조경(趙璥, 1727 ~ 1787)이 아내의 죽음 때 지은 뒤 몰년인 1787년에 추가한 것이다.


조경은 자신이 행도(行道)의 직임을 많이 맡았지만 벼슬로 나아감과 벼슬에서 물러남, 현달함과 곤궁함이 조처로 나타난 것은 모두 자기가 원한것이 아니라 억지로 세상 인연에 맞춘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지식인으로서는 행도와 명도의 책임이 있다. 이를테면 조선후기의 최한기는 행도와 명도의 상호의존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덕이 있고 지위가 있어 몸소 도를 행하는 사람과 덕이 있으나 지위가 없어 서적을 저술하여 도를 밝히는 사람에 대해 등분을 논하자면 도를 행함은 한 나라와 한 시대에 지나지 않고 도를 밝힘은 천하만세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도를 행하는 사람이 없으면 도를 밝히는 사람이 의거할 데가 없고 도를 밝히는 사람이 없으면 후세에 도를 행하는 데에 경유해야 할 길이 없다. 행하는 자와 밝히는 자는 때와 장소에 따라 언제나 없는 적이 없다. 선악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선악을 밝히는 자가 있고 차오(差誤)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차오를 밝히는 자가 있어 수천 년에 이르도록 민간의 포폄(褒貶)과 현준(賢俊)의 수명(修明)이 의거하는 준적(準的)이 된다. 이것이 점차로 실다운데로 옮겨져 말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도 수천년의 경험이 치란혼명(治亂昏明)에 빼앗기지 않고 편견(偏見)과 천식(淺識)에 구애되지 않아 저절로 일통의 변하지 않는 운화(運化)의 도리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고금의 사람들이 의거하는 준적이다. 총명이 여기에 이르면 과거와 미래의 존귀하고 비천한 사람들의 행동이 모두 권징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게된다.



조경은 초명이 준(埈)이었다. 회갑을 맞은 1786년(정조10)에 역적 이준(李濬)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준(埈)에서 경(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관은 풍양, 자는 경서(景瑞), 호는 하서(荷棲)이다. 서울 연방동(蓮坊洞)에서 태어나서 14세 되던 1740년(영조10) 이천보(李天輔)의 따님과 결혼했다. 이천보는 연안이 본관으로 박지원의 스승이다.


조경은 비명에 다섯 살 무렵에 지은 동몽시(童蒙詩)를 실어둘 정도로 조숙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한 것은 늦은 편이다.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슬픔이 지나쳐 몸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간신히 건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36세 되는 1763년 (영조39) 10월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승정원 기주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의 친림시(親臨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검열이 되었다.


1766년(영조42) 5월 홍문록에 뽑혔으나 종형인 조돈(趙暾)에 연루되어 삭제되었다. 9월 수찬이 되어 진계하는 소를 올렸다가 엄명을 받아 고풍산(古豐山) 만호에 제수되었다. 곧바로 수찬이 되었다. 1771년12월 통정대부로 올라 광주 부윤이 되었다. 이후 영조 말년에 대사성,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승문원 제조에 차임되었다.


51세 되는 1777년(정조원년)에 좌승지로서 증광 문과의 시관이 되었다. 이어 대사헌으로 있다가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1799년 자헌대부의 품계에 올라지돈녕부사가 되어 내직으로 들어왔다. 1781년7월 <영조실록>을 완성한 공으로 정헌대부에 오르고 <국조보감>찬수당상 되었다.


지중추부사로 있던 1782년(정조6)1월 채제공(蔡濟恭)을 비호한다는 이명식(李命植)의 무고를 받자 소를 올리고 도성을 나갔다. 그뒤 병조판서,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1월 <국조보감>이 완성되자 승정대부에 올랐다.


1786년(정조10) 2월, 규장각 제학이 되고 3월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해말에 호조판서 겸 규장각 검교제학에 제수되었다.


1787년(정조11) 정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역적 이담(李湛)과 이인(李絪)을 정토하는 토역소(討逆疎)를 올렸다. 이때 이후 역적 이준(李濬)의 이름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준(埈)에서 경(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숭록대부로 올라 우의정이 되었으나 문효세자의 역적을 징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직소를 올리고 양주 천천(泉川)의 추사(楸舍)로 돌아갔다. 3월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입시하여 숙배했다.


1787년에 <자명(自銘)>을 작성했다. 12월 6일 병으로 흥인문 밖 교사(喬舍)에서 졸했다. 상이 부고를 듣고 효자로 정려하고 충정(忠定)의 시호를 내렸다. 양주 진전향(陳田鄕)괘현리(卦峴里)에 장사지냈다.


조경이 졸한지 얼마 안 되어 그 아들 조진구(趙鎭球)와 조카 조진명(趙鎭明)이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준비했다. 조진구는 저자가 지은 부인의 묘명(墓銘)과 자명(自銘)을 실어 묘갈을 세우고 저자에게 내렸던 윤음(綸音) 다섯편을 모아 은륜비(恩綸碑)를 세웠다. 조진명이 평양 서윤으로 있으면서 장례 당시 조정에서 내려준 제수비용으로 문집의 공역을 진행했다. 원집 11권을 1789년 5월 목판으로 간행한 뒤 책판을 평양부에 보관했다.


한편 장례 때 조진구는 가계와 사적을 다시 적어 광(壙)에 넣고 별도로 연보도 찬술했다. 이 연보는 정유자의 활자로 간행했다.



참고문헌


* 조경(趙璥) <자명>, <하서집>, 묘표,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245,


* 하서 조충정공연보(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임진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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