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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운영위원
제 목    견성암(見聖巖)

견성암(見聖巖)


 


고려 태조가 조시중공과 만났다는 바위에 붙여진 이름이다.이 바위 가운데에 굴이 있어 시중공이 은거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현재 시중공의 동상을 굴속에 안치하였다.


 



견성암(見聖菴)


견성암은 고려시대 풍양현이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는 풍양조씨 시조의 유적지에 세워진 암자로써 풍양조씨의 재궁이다.



암자의 뒤에 있는 방 두칸 정도의 석굴은 신라말기에 후일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신분이 은거하며 수양하던 곳이다.



공의 초명은 "바위"로 보첩의 "파회(破回)"는 바위의 음역이다.


후삼국 통일을 앞두고 현자를 물색하던 후일의 고려 태조가 된 완건은 공의 성명을 듣고 이곳으로 '바위'를 찾아와 경국지사를 논한바 한번의 만남으로 의견이 합치되어 즉석에서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길로 왕건을 따라 남방정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고려개국공신이 되고 "조맹(趙孟)"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니 이 분이 바로 풍양조씨의 시조이시다.



그 후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고려중기쯤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그 후손이 선조의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석굴앞에 암자를 지었으니 이것이 견성암의 유래이며 그후 여러차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양주군지에는 견성암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 있기로 여기에 소개한다.



"견성암은 진건면 송릉리 3번지 천마산에 있는 절로써 고려 개국 공신인 풍양조씨 시조 시중 조맹이 은거양덕하다가 약사성을 친견하였다." 하여 그 후손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절을 짓고 견성암이라 하였으나 처음 창건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대략 고려 중엽으로 추정된다.



조선 철종 11년(1860년)에 조시중의 후손이며 스님인 보월 혜소가 법전(법당의 별칭)과 양화루를 중수하고 고종 19년(1882년)에 봉성화상이 중수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옛 기록으로는 견성암 중수기, 견성암 양화루기, 견성암중수 각부 탱화신성기 등이 있고 조시중이 수양할 때 홀로 마시던 우물이란 뜻으로 독정이 사정에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아 인근 부락에서 가물때에는 음료수로 길어 가기도 하여 이절을 [독정이 절]이라 하며 절아래 마을을 독정리라 부른다.


또한 조시중이 수양할 때 기거했다는 수양굴이 있고 조씨문중에서 이름있는 사람이 별세하면 가지가 하나씩 말라 죽는다는 기념송이 있는데 이는 조시중이 기념으로 직접 심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천년노송인 기념송은 미증유의 국가 환란인 6.25가 나던해인 1950년 산영각과 약사전 사이에 쓰러졌으나 신기하게도 이 두 건물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덧불일 말은 견성암을 표기할때 예로부터 "庵"자를 "菴"로 쓴 기록도 적지 않으며 반드시 어느 "자"가 옳다고 주장함은 옛어른들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되어 논란을 삼가는 바이며, 견성암이 위치한 곳은 천마산의 지맥인 독정산인데 천마산의 '磨'를 '摩"로 쓰는 일이 자주 있어 지적하니 앞으로는 '갈마字'인 '磨'로 써주기 바랍니다.


조선조 신정익황후때에 이르러 국모의 명령으로 크게 중수를 가하였으니 어지신 국모께서의 조상을 섬기는 정성이 무엇보다 뛰어났음을 알수있다.현재도 우리 대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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